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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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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마지막 모습을 보신 적 있으세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보이스카웃을 했었다.덕분에 지금 불고 있는 캠핑열풍을 20년전 전국을 돌아다니며 즐겼다.가까이는 학교 운동장부터 멀리는 제주도 어느 마을까지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이 이야기는 중학교 때 보이스카웃에서 캠핑을 갔을 일이다. 대청댐에서 전국단위의 합동 야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다양한 활동을 마무리하고 어느덧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그 당시 우리 스카웃을 인솔하던 대장님은 참 독특한 사람이었다. 말이 좋아 독특한거지 요샛말로 돌+아이 같은 개성 넘치던 분이었다.이 분이 마지막 날 밤이라고 걸스카웃과의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남정네 밖에 없던 우리학교 스카웃들은 돗자리에 각종 과자와 음료수를 한 상 거하게 차려놓고걸스카웃 친구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때 돌+아이같은 대장님이 ..
미래에 대한 고민 나이는 서른 중반을 넘어 후반에 접어 들었다.결혼을 한 지 3년.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 난 그렇게 가장이 되었다.2009년부터 시작한 10년차 회사 생활은 과장이라는 직함을 달아주었다.물 흐르듯 큰 부침없이 그냥그냥 흘러온 인생인 것처럼 느껴진다.결혼 전까지만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지금 현재 나의 발전이 더 중요했다.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서른 후반의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도 없고 배워 놓은 기술도 없이 마케팅을 한다고 10년을 보냈다.이 생활을 얼마나 길게 이어갈 수 있을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한다.'10년 후에 나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최소한 마케팅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을 거 같지는 않다. 대표가 되어 기업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모습..
독수리와 황새 '독수리와 황새' 이 두 단어가 쓰여진 메일을 받고 얼마나 글을 쓰고 싶었던가.내가 응원하는 축구팀의 전감독과 현감독은 특이하게 '새'관련 애칭이 있다.한 사람은 독수리라고 불리고 또 한 사람은 황새로 불린다.이 둘은 K리그에서 알아주는 공격수였으며 둘다 일본으로 건너가 J리그 최고의 공격수 자리에 올랐다.두 선수 모두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를 지냈지만 '독수리'는 어이없는 문전결정력으로 빛을 보지못했고'황새'는 월드컵 개막전 첫번째 골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며 4강을 이끌었다. 시간이 흘러 '독수리'는 본인의 둥지에서 플레잉코치-코치-수석코치-감독대행을 거쳐 '순혈 FC서울' 감독이 되었고 '황새'는 2008년 부산을 시작으로 감독생활을 시작하여 본인의 둥지인 포항에서 리그우승과 컵대회 우승을 달성했..
손톱 수난기 그 어렵다는 금연을 너무나도 쉽게 성공했지만 금연보다 날 더 힘들게 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바로 손톱과 발톱 물어뜯기다. 손은 보통 여자들보다 작은데다 손톱을 물어 뜯어 내 두 손은 항상 상처투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손톱물어뜯는 버릇을 고쳐주기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셨다.물어뜯을때마다 혼내기도 하셨고 손톱마다 빨간약을 발라보기도, 쓴 맛이 나는 약을 발라보기도매니큐어를 발라보기도, 반창고를 붙여보기도 했지만 이 버릇은 좀처럼 좋아지지가 않았다.손톱을 물어뜯는 행동이 애정결핍에서 기인한다고 하지만 자가진단을 해보자면 애정결핍은 절대 아니다.그렇다고 뭔가 불안해서 물어뜯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습관인 것이다. 아니다, 습관이라기보다 강박증에 가까운 행동 때문일 것이다.난 손톱이 자라나면 보..
교실이동 국민학교(a.k.a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담임선생님의 갑작스러운 건강악화로 우리 반은 나머지 9개반으로 분산되어야 했다.선생님이 쾌유하셔서 돌아오실 때가 임시로 분산 되었지만 어린마음에 굉장한 충격이었다.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제비뽑기였던걸로 기억난다.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지만 당시에는 잘나가는 반이 몇 곳 있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분위기 좋고 잘나가는 반으로 가기를 모두가 원했다.(라고 믿고 싶다ㅠㅠ)내 차례가 되었고 신중하게 종이를 뽑았다. 제발 8반 되게 해주세요...좋아하던 여학생이 있던 8반이 되는 것이 최고의 결과였다.하지만 내 뽑기운은 이 때부터 재수가 없었는지 8반 대신 7반이 뽑혀나왔다.7반이라니!!!! 친한 친구도 없고 조용히 있는 듯 ..
신문과 마케팅 스마트폰이 시장에 안착하기 직전까지 신문은 우리네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누구나 할 거 없이 무가지 신문을 보고 있었고버리고 간 무가지를 수거하러 다니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쉽게 볼 수 있었다.하지만 신문은 소식을 전달하는 최고의 매체자리를 스마트폰에 내주었다.뉴스를 받아 인쇄를 해서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신문의 특성상 스마트폰의 빠른 전달속도와 공유속도를 따라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예전처럼 집 근처에서 신문보면 자전거 준다는 아저씨조차 사라지고 없으니'신문의 위기' 라는 말 조차 이제는 필요없는 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 와중에 신문의 특성을 가지고 브라질의 '카페 펠레' 라는 커피 브랜드가 신박한 마케팅을 하고 있다.커피원두는 진공포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신선..
결심 참으로 나약했다.세상 모든 것에 무궁무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싫증을 냈다.작심삼일은 고사하고 작심하루를 못가는 날이 허다했다.한 번 시작한 걸 끝맺은 적을 손에 꼽을수 있었을 정도로 수없이 포기를 했다.어느 한 분야만 그랬던것도 아니고 공부, 취미, 운동 하다못해 연애까지...그야말로 [프로중도포기자] 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처참히 사랑에 실패한 후 인생최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나 자신에게 오기가 생겼다.한편으론 '뭐하나 제대로 끝낸 적 없는 놈이 도대체 뭘 할 수 있지?' 자괴감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넌 이를 악물고 버틸 자신이 있는가?'그리고 난 나 자신에게 대답했다. 버티겠노라고. 이를 악물고 버티겠노라고. 그렇게 미약하게나마 10Km 마라톤을 시작하게 되었다...
컴퓨터 인생 아들을 위해서라면 모든지 다 해주려고 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컴퓨터라는 물건을 참 빠르게 접했다.내 첫번째 컴퓨터는 5.25인치 디스크 두 개가 달려있는 무려 286 컴퓨터였다.초록색(?) CRT 모니터가 육중한 몸을 본체에 맡기는 전형적인 데스크탑 모델이었다.그 당시 컴퓨터로 할 수 있던건 고인돌 이나 페르시안 왕자같은 게임이었다.게임을 한번 하려면 플로피디스크를 순서대로 준비해놓고 기다려야 했다.(플로피디스크라고 하면 어린 친구들은 무슨 소린가하겠지?) 어머니의 선경지명이었을까? 아님 내 미래의 복선이었을까?그 당시 찾기도 힘들었던 컴퓨터학원에 등록해서 프로그래밍을 배우게 하셨다.당시 배운 언어는 GW-Basic 이었다. 베네치아를 통해 키보드 연습도 적잖이 했던걸로 기억한다.그 때 더 열심히 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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