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로 글을 시작했는데 적금으로 마무리되는 놀라운 사건의 흐름. 전개수준이 거의 대한민국 아침드라마 급이다.
여기서 잠깐 브레이크를 잡고 시간을 조금만 뒤로 돌려보려한다. 한 10년전 즈음으로??
결혼하기 전으로 기억하는데,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40살 생일에 리버풀에서 한 달 동안 살면서 홈경기, 원정경기 그리고 펍에서 축구보면서 콥(KOP)처럼 살아볼거야. 그게 내 버킷리스트야.’
지금 생각해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저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서 한 달이라는 휴가를 쓸 수 있는 상황이거나 휴직상태여야한다.
결혼 전 부터 불확실한 미래를 펼쳐보이는 예비신랑이라니.. 이것도 가거 차는대 더 놀라운 건 버킷리스트의 전제가 ‘혼자’ 라는 사실이다.
아이가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서 그렇다쳐도 아내를 혼자 놔두고 자기 혼자 즐기겠다고 영국을 한 달동안 혼자간다니...
이 정도면 사실 결혼하지 말자는 얘기 수준아닌가??
다행히 아내를 FC서울이라는 축구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만났기 때문에 내 이런 ’광기어린 축구사랑‘(?)이 어느 정도 용인되었던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당시 아내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래 다녀와, 대신 결혼 10주년엔 하와이에서 리마인드 웨딩 할거야 라고 되받아쳤다.
시간은 어찌어찌 흘러 우리에겐 두 명의 아이가 생겼고 내 나이도 40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콥(KOP)이 되겠다는 꿈을 여러번 내비쳤지만, 사실 아이가 생긴 다음부터 내 버킷리스트는 이룰 수 없는 꿈.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알 수 없는 성분의 각성제 역할을 할 뿐이었다. 갈 수 없는 그 곳을 동경하면서 행복해하고 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맞이한 40살 생일.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해 시작을 알 수 없는 역병이 전세계를 뒤덮었고 모든 나라가 공항의 문을 걸어잠궜다.
나 버킷리스트는 핑계도 좋게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갈 수 없으리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지는 않았다. (아... 그 해 리버풀이 우승을 했다.)
속절없이 40 생일이 지나가고 있던 어느 날 아내가 말을 했다.
‘우리 신랑 40살에 리버풀 가야되는데 못가서 어쩌냐. 내가 우리 신랑 리버풀 보내주려고 적금도 들고 있었는데.’
‘아쉽기는 뭐 갈 상황도 안되느.....응??? 뭘 하고 있다고???’
‘자기 리버풀 보내주려고 적금들고 있었다고. 꽤 많이 모였는데... 아쉽네’
아내는 내 버킷리스트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없는 살림에도 남편 여행경비를 모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말려왔다.
이 사람은 뭔데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거지??? 내가 뭐라고???
맨날 야근한다고 늦게 들어와, 집안일은 1 정도 도와줘,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도 아닌데...
혹시???? 그래!!!!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구나!!!!
그날 난 전생에 내가 뭘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뭘 했던 사람인지는 알게 되었다.
물론 적금의 실체를 보지도, 리버풀을 가지도 못했지만 그 날은 내 인생에 가장 인상깊은 날로 남았다.
다시 2023년으로 돌아와서...
2년 전 내 버킷리스트를 이뤄주려던 사람이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 잠시 쉬었다가라고.
심지어 본인이 더 적극적이다. 언제 무슨 경기가 있네, 이 일정으로 가면 되겠네.
그래 확실하다. 난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틀림없다.
아. 물론.. 난 결혼 10주년 하와이로의 리마인드 웨딩에 대해 1도 준비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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