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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100일 글쓰기

밥솥과 생존

20대 중반, 군대를 마치자마자 세상에 부딪혀보겠다고 호기롭게 호주로 건너갔다.

언어의 장벽이야 어떻게든 넘어 갈 수 있었지만 

요리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나에게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호주생활 초창기 좋은 사람들과 하우스를 쉐어하게 되어 

한국에서보다 더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었지만 그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난 생존을 위해 '적어도' 밥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밥솥은 구매했다.

하지만 떠돌이 생활을 하는 나에게 쇠로 된 밥솥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거였기에 

가볍디 가벼운 전자렌지용 밥솥을 구매했다.

전자렌지용 밥솥은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아이템'으로 

쌀과 물을 적절하게 넣고 10분정도 전자렌지를 돌리면 따끈한 밥을 만들어 주는 

여행자들에게는 마법지팡이와도 같은 아이템이었다.



단, 이 마법지팡이의 단점이 하나 있는데

밥이 식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쌀이 암석화된다는 점이었다.

따뜻할 때는 밥솥에서 지은 밥처럼 꼬들꼬들 맛있는 밥을 제공하지만

시간이 지나 밥이 식으면 누룽지는 댈 것도 아닌 정도 강도의 딱딱함을 자랑했다.

이런 단점을 알면서도 난 이 아이템을 호주는 물론 귀국 할때도 베낭 한 켠에 고이 가져왔다.

나에게 이 밥솥은 단순히 밥을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적어도 맨밥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취사병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난 아직까지도 요리를 할 줄 모른다.

다행히도 에그 스크램블이나 김치찌개는 끓일 수 있게 되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도찐개찐이다.

그래도 나에게 마법의 지팡이가 있다면 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다.


- 100일동안 글쓰기 여섯번째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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