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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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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를 아끼면 아이를 버린다. 아부지가 내 곁을 떠나시기 전까지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난 아부지한테 맞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물론 어렴풋한 기억에 회초리를 맞거나 혼난 적은 있었어도 '맞아' 본 기억은 떠올리기 어렵다.어머니한테는 사실 몇 번 맞았고 그 상황도 생생히 기억난다. 하지만 그 맞았다는 것도 뺨을 몇대 맞은거 회초리를 몇 번 맞은 것 뿐이지그 이상의 폭력을 행사하셨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부모님들이 맞벌이를 하셨기에 신경을 덜 쓰셨던건 아니었을까 의심해보면가족하고 보낸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르기에 그 의심은 아닌거 같다. 하지만 난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어머니를 무서워했다.물론 부모님을 무서워했다고해서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다. 부모님에게 느낄수 있는 무서움이랄까? 존경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무서움?두 분은 나에게 존경..
죄송합니다병 사회생활을 하면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쓴다.생각해보면 미안한 일도 아닌데 유독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나온다.그렇다고 가볍게 던지는 영혼 없는 말이냐고 한다면 또 그건 아니다.성향 자체가 소심하고 걱정이 앞서는 나로선 내 행동행동 하나에 신경이 쓰인다.내가 던진 말의 뉘앙스, 말의 높낮이, 단어의 선택 하나하나가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던지는 내 최소한의 예의다.혹자는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하면 지는거라 그 말을 자주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다. '죄송하지만 공유해주시겠습니까?'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확인 부탁드립니다.'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자주 이야기를 한다.괜한 오해로 관계가 망가지는 걸 극도로 힘들어 하는 성격의 나에게 최소한의 방어막이 아닌가 싶다.가..
밥솥과 생존 20대 중반, 군대를 마치자마자 세상에 부딪혀보겠다고 호기롭게 호주로 건너갔다.언어의 장벽이야 어떻게든 넘어 갈 수 있었지만 요리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나에게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넘기 어려운 일이었다.호주생활 초창기 좋은 사람들과 하우스를 쉐어하게 되어 한국에서보다 더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었지만 그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난 생존을 위해 '적어도' 밥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밥솥은 구매했다.하지만 떠돌이 생활을 하는 나에게 쇠로 된 밥솥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거였기에 가볍디 가벼운 전자렌지용 밥솥을 구매했다.전자렌지용 밥솥은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아이템'으로 쌀과 물을 적절하게 넣고 10분정도 전자렌지를 돌리면 따끈한 밥을 만들어 주는 여행자들에게는 마법지팡이와도 같은 아이템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무방비 상태에서 맞이하는 첫째의 애교.내 옆에 있는 와이프의 모습. 여전히 연애할 때의 감정이다.응원하고 있는 축구팀이 승리했을 때.세계 각국의 축구 유니폼을 볼 때.추운 겨울 한 2시간 정도 축구 하고 나서 숨이 가빠올 때.외국 공항에서 세관 검사를 마치고 게이트를 나가기 직전.책을 읽다 가슴에 꽂히는 한 문장을 발견했을 때.아무 생각없이 찾아간 커피숍에서 맛있는 커피를 먹었을 때.햇살이 잘 비추는 까페를 찾아갔는데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설겆이 할 때.친구녀석이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할 때. 생각보다 '행복하구나' 하는 장면이 잘 안 떠오르는구나..... -100일 동안 글쓰기 다섯번째 날 -
계륵 밖에서 운동 하는 걸 좋아한다. 한 때는 인라인도 탔고 스노우보드도 꽤 오래 탔다.눈이오나 비가오나 축구장에서 축구를 하기도하고 보기도 했다.자전거로 제주도 일주나 7번 국도 일주도 했다.다양한 활동을 할 때마다 핸드폰으로 꼭 동영상을 찍었다.사진이 주지 못하는 역동성과 현장의 생생함을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장비병이 도졌고 그 무렵 '액션캠' 이 인기를 끌었다.네모난 작은 카메라는 스킨스쿠버, 스카이다이빙을 즐기고만년설이 쌓인 산을 스노우보드로 내려왔으며 여행지를 함께 했다.갖고 싶었다.나도 가슴팍에 카메라를 달고 멋진 활강을 할 수 있을거 같았고여행을 갈 때마다 멋진 동영상을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개월을 모니터쇼핑만하다 결국 신혼여행 핑계로, 그것도 공항 면세점에서가장 유명하다는 '고XX..
부모님의 잔소리 부모님의 잔소리는 언제나 예고가 없었다.TV를 보고 있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심지어 공부를 하고 있다가도 '훅' 들어왔다.잔소리의 장르는 참으로 다양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잘못은 내가 다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옷 좀 걸어놔라, 일찍 다녀라, 밥 먹을 때 김치 좀 먹어라, 일찍 자라, 일찍 일어나라...좋은 말도 계속 들으면 싫어진다는 데 잔소리는 오죽할까.옷은 걸어 놓고, 좀 일찍 다녔으면 잔소리 안 들었을텐데 왜 그리 어려웠을까?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잔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장르를 달리해서 그 영역을 확장 했을 뿐...나의 성장은 부모님의 잔소리와 함께 했다. 어느덧 불혹이 코 앞에 다가왔다.난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여전히 난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는다. 다만 바뀐 게 ..
오후의 망중한 무려 25년만에 이사를 했다.이사 가기 전 집은 1층이었다. 옛날 아파트라 동과 동 간격이 넓어 나름 햇빛도 잘 들었다.물론 어느 시간이 되면 다른 아파트에 가려 그늘이 지기는 했지만 짧게마나 햇빛이 들어오는 그 시간이 좋았다. 키우고 있는 강아지 녀석은 용케도 그 자리를 기억하고 시간에 맞추어 자리를 잡는다.그렇게 오침을 즐기는 녀석의 모습은 몇 안되는 귀여운 모습 중 하나였다. 25년만에 이사를 한 집은 하늘에 손이 닿을 것 같은 고층이다.태어나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가릴 것도 없고 막힌 곳도 없어 그야말로 풍광과 채광이 기가 막힌다. 이사 하고 나서 뭐가 그리 바쁜지 거실 쇼파에 앉아서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그러다 지난 주, 여유가 생겨 쇼파에 앉았는데 어찌나 햇빛이 따사롭..
명함 교환과 그 저장의 가벼움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명함이라는게 만들어진다.한 뼘도 안되는 종이조각 안에 회사에 맞고 있는 업무와 직책 그리고 간략한 연락처가 적힌다.명함의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나를 알림에 있다.처음 인사하는 거래처 사람에게 이 종이조각은 군더더기 없이 나를 소개한다.물론 상대방이 전하는 명함도 나에게 주인의 정보를 가감없이 전달한다.불과 4~5년전만 하더라도, 명함을 받고 나서 해야 할 일이 세가지나 있었다.첫째는 이 명함은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 간략하게 메모를 하는 일둘째는 명함을 보기 좋고 사용하기 쉽게 분류하는 일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렇게 세 가지 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진짜 명함을 받았다.' 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중요도가 따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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